|
|
카테고리
![]() 이제부터 나는 아주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늘어놓을 참인데, 어젯밤 나는 카포에라 수업을 마치고 카페에서 친구를 만나 주스를 한잔 마시며 내일부터 시작이라는 장마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눴다. 그리고 집으로 오는 길에는 한결 자연스러워진 이빨에 '씹으니까 살 맛나는' 느낌을 선사해주고자 후라이드 통닭 한마리를 샀다. 통닭을 까고 마주한 티브이에서는 얼마 전 로체샤르 등정에 성공한 엄홍길 대장이 나와 당시의 상황을 조목조목 들려주고 있었는데 그것은 내가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종류의 느낌들이라 퍽 감동적이었다. 신문사에서 근무할 때 그의 로체샤르 등정 소식을 내가 기사화 했는데 기상청에서 보내온 보도자료는 등정의 과정이라거나 로체샤르는 뒷전이고 기상청 홍보대사인 엄홍길과 기상청이 이번 등정에 한 몫한 점은 무엇인지에 초점이 맞춰져 있어 곤혹스러웠던 기억이 난다. 나는 눈 질끈 감고 다른 신문사의 기사를 참고해 로체샤르와 엄홍길에 대해서 써야 했다. 군더더기 없이 간결하고 기상청도 만족할만한 기사였다고 생각한다. 나는 만족스럽게 닭 한마리를 해치우고 내가 해야 할 등정에 대해서 생각했다. 기름진 음식과 비 오기 하루 전의 날씨는 내게 이미 충분한 바람을 불어넣었다. 이런 바람들 속에서 나는 어떤 사람도 될 수 있다. 근처에 있는 대학교의 학생은 한번씩 다 해본 것 같고 때론 광고를 공부하며 미술학도도 됐다가 어쩔땐 '재미없는거 해요'라고 한 뒤 계속 궁금해하면 경영학이라고 대답하곤 했다. 이번엔 영화를 공부하는 '가난한 대학생' 노릇이었다. 꽤나 가까운 거리에 있는 사람이었는데 택시 타고 올꺼냐고 묻길래 나의 신분을 '가난한 대학생'이라 밝히고 걸어가겠노라고 한거다. 거리를 걷는데 빗방울이 하나둘 스쳤다. 문 닫은 수퍼마켓을 지날 때 였다. 박스채 내놓고 팔았던 것 같은 파인애플들이 구겨진 신문지 틈 사이로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아뿔사! 이걸 들여놓지 않은 수퍼마켓 주인은 지금쯤 편히 주무시고 계시려나. 아그그 파인애프을 하면서 벽을 긁고 계시려나. 나는 긴 잠을 자고 오진 않을테니까 이따가 들리겠노라고 파인애플들에게 인사를 건냈다. 그제서야 그들은 '심지어 우리 골드야' 눈도장을 확실히 찍어주었다. 스크류바와 부라보콘을 두개 들고오더니 내게 부라보콘을 건냈다. 이거 왜이러냐고 난 지금 딱 스크류바라고 교환할 것을 제시했지만 고집이 있으시길래 이걸 샀다는 편의점에 들어가서 스크류바로 바꿨다. 편의점 주인은 500원을 거슬러주며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편의점을 나오니 그 사람은 주차금지 턱에 앉아 스크류바 한입과 담배 한모금을 번갈아 먹고 있었다. 그 모습이 꽤 귀여웠다. 빅포니가 새겨진 폴로셔츠가 전조였달까. 한 밤에도 후텁지근한 열기가 돌고있는 옥탑방 안은 또한 어울리지 않게 랄프로렌에게 헌정된 방 같았다. 랄프로렌의 가방들과 셔츠들이 어지럽게 가득차 있었고 심지어 침대 머리 맡에는 랄프로렌의 사진이 액자에 담겨 걸려 있었다. 이정도면 질문이라도 해주는게 예의일까 싶어 정말 좋아하시나봐요 라고 물었더니 삶의 신조랬나 목표랬나 하여간 안그러려고 해도 피식 웃을 수 밖에 없었다. 충분히 만족할만한 섹스였다. 종아리와 허벅지가 같은 사람의 것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서로 다른 느낌을 주었는데 그것은 팔도 마찬가지였다. 종아리가 또 팔의 하완이 정말 침이 꿀떡 넘어갈만큼 매력적이었다. 담배 좀 필 수 있냐고 묻자 팔을 끌고 옥상으로 향하는 문을 열었다. 지금 우리 알몸인데? 아이고 됐다 싶어 그냥 순순히 끌려가서 문 앞에 쪼그려 앉아 빼끔빼끔 담배를 피우며 밤이 그렇게 어둡지 않다고 생각했다. 때로 어떤 밤은 너무 깜깜하기만 하던데. 건너 옥상에 누가 있으면 그대로 우리 모습을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면 꼭 브이를 해야지. 아무리 생각해도 그 모습은 사진으로 남겨둔대도 랄프로렌 식 삶을 크게 배반하는 일 같지는 않았다. 내심 자고 갔으면 하는 눈치길래 지금 여기는 한 사람이라도 떠나서 온도를 낮춰야 한다고 또 은근히 잠자리를 가려서 잠은 집에서 자야한다고 주장했지만 스크류바 때 처럼 고집을 꺾지 않길래 나는 어쩔 수 없이 파인애플 이야기를 꺼낼 수 밖에 없었다. 나의 신분을 알지 않나? 나는 '가난한 대학생'이다. 그들에겐 과일이 절실히 필요하다. 그럼에도 그깟 파인애플, 껍질 까다가 날 샐 꺼라고 툴툴대더니 결국 그것만은 참으려던 나의 '골드' 언급에 완전히 백기를 들었다. 어느새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어 우산을 하나 빌려올 수 밖에 없었다. 다시 길을 걷는다. 편의점에 들러 담배와 포카리스웨트를 사서 벌컥벌컥 마신다. 온 몸으로 쭉쭉 달콤한 수분이 퍼져나가는 기분이 좋아 괜히 헤쭉 웃었다. 수퍼마켓 앞에 도착했다. 나는 지금 어이가 없다. 분명히 있어야 할 파인애플 박스가 통째로 없어졌다. 누군가 박스 채로 들고 튄 것이다. 이건 상도덕에 어긋난다. 나는 억울한 주인을 생각해서, 또 이 앞을 지나칠 '운 좋은 가난한 대학생'을 위하여 두덩이만 가져올 생각이었다. 이 앞을 지나칠 '운 좋은 가난한 대학생'이 없었다면 그 두덩이는 수퍼마켓 주인의 부주의에 대한 경고 정도로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누가 파인애플을 모함했나? 날이 밝으면 사라진 파인애플을 둘러싸고 작은 소란이 벌어지겠지. 세상이 말이야로 시작돼 동네사람도 무섭다는 결론에 도달할 그 소란에 나는 아무 발언도 하지 않을 예정이다. 작은 방에 앉아 빗소리를 들으며 또 버리지도 어쩌지도 못하는 우산이 하나 늘었다고 머리를 긁겠지. 오랜만에 큰 비가 내린다고 한다.
최근 등록된 덧글
산이의 명복을 빕니다.
by _app_ at 05/08 히히 얼굴한번보자 by 김정은 at 04/27 아니 이게 누구야!!!!!! by playtime at 04/26 잘 지내? 갑자기 생각나서 .. by 김정은 at 04/26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 by 순딩이 at 03/26 글 잘 봤습니다. 질문 드릴.. by ^-^ at 01/23 출처는 밝히겠습니다^^ by 카프카 at 01/23 네이버 디매에 좀 올릴게요^^ by 카프카 at 01/23 꺅//ㅂ// 연경씨 너무 좋아요... by 제절초 at 01/15 bedside table!!!!!!!!!!!!!!!!!!!!!.. by 좀비씨 at 11/05 최근 등록된 트랙백
포토로그
|
|